대흠무는 그들과의 관계를 계속 좋게 가지도록 함으로써 서부국경의 안전을 도모하도록 하였다.
한편 대흠무는 동족의 나라인 신라와 바다건너 일본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785년경에 수도를 동경(청진시 부거 혹은 중국의 길림성 훈춘 팔련성)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발해와 신라사이에는 역참이 개설되였는데 옛 문헌에 의하면 동경소재지인 책성으로부터 신라의 정천군(오늘의 덕원)까지 39개 역참이 있었다고 한다.
그 길을 따라 790년 3월 신라의 사신인 일길찬 백어가 북국(발해를 가리킴)에로 력사적인 행보를 하게 되였다.
대흠무는 통치 전기간 일본을 보잘것 없는 나라로, 일본의 임금을 속국의 제후와 같은 존재로 하대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일본이라는 나라는 발해에 비교도 안될만큼 뒤떨어져있었기때문이였다.
대흠무는 일본에 가는 사신들에게 국서도 지참시키지 않고 자기의 말을 구두로 전하게 하였으며 혹 문서를 보내는 경우에도 대충하였다. 그래도 일본측은 대흠무의 위세에 눌리워 발해사신들을 후대하여 보내였다.
대흠무가 대국이라고 자처하던 서쪽의 당나라에 취한 《오만》한 태도는 그의 자존심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잘 보여주고있다.
중국의 력사이야기책 《수당연의》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740년대초경이였다. 그때 당나라임금 현종은 양귀비를 무척 총애하며 그의 치마폭에 푹 빠져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지방의 관리들이 임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공물을 올렸는데 도로에 끊길 날이 없었다. 이역의 여러 나라와 종족들도 령물스러운 새와 괴이한 짐승, 기이한 보물과 진귀한 토산음식물들을 가지고 산 넘고 바다 건너 바치러 왔다. 현종은 기뻐하며 멀든 가깝든 모두 손님으로 맞아주게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발해국에서 사신을 보내여왔는데 요란한 토산물은 고사하고 국서 한통만 가지고왔다.
연변의 관헌들이 먼저 글을 보내여 보고하고 발해사신은 며칠후에 수도에 도착하여 관사에 들었다.
현종왕은 소감 하지장에게 관반사(접대사신)의 임무를 맡겨 사신이 온 뜻을 문의하게 하였다.
사신은 통역관을 시켜 《국왕께서 국서를 보내신 뜻을 사신들이 어찌 알리까. 당국 임금께서 글을 펼쳐보고 더 분명히 알게 되기를 바랄뿐입니다.》라고 대답해주게 하였다.
조회때 하지장은 발해사신을 데리고 들어가 임금에게 국서를 올렸다. 합문사인이 전달받고 어전에 가져갔다.
현종왕은 발해사신에게 관사에 돌아가 있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날의 선주관이였던 소경에게 개봉하여 읽게 하였다. 소경은 국서를 개봉해보고 깜짝 놀랐다. 글자는 초서도, 예서도, 전서도 아닌데 글자형태가 기이하여 전혀 알아볼수 없었던것이다.
《발해글자 형적이 모두 올챙이형태 같은데다가 신이 본시 용렬하고 우둔하여 판별할수 없으니 성상께서 밝혀주시기를 엎드려 기다릴뿐이옵니다.》
소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