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지역 첫 인민혁명정권인 약수동쏘베트정부,
동북지역 첫 인민정권을 보위하는 홍색무장대인 평강구유격대,
동북지역 첫 중심현당위인 연길·화룡(이하 연화)중심현위원회,
동북지역 첫 농촌당원대표대회인 동만당원대표대회,
동북지역 첫 농민대표대회인 연화농민대표대회,
동북지역 첫 농촌군사위원회인 평강구군사위원회,
동북지역 첫 구급 쏘베트정부인 평강구쏘베트정부,
동북지역 첫 농민혁명운동 주제가인 <굶주린 백성 투쟁의 노래>…
이 많은 첫시작들은 15가구가 살고 있었던 약수동 상촌에서 잉태됐다. 상촌, 중촌, 하촌 3개 마을의 200여가구로 이뤄진 약수동, 그중 가장 작고 편벽한 마을은 상촌이였단다.
화룡시 투도진 룡문촌에 위치한 약수동쏘베트정부유적지.
이 단락의 력사를 더듬어보려 지난 26일에 화룡시 투도진 룡문촌 제5촌민소조에 다달으니 ‘화룡현약수동쏘베트정부유적지(아래 유적지)’라고 씌여진 큰 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양, 무늬, 색상 어느 면으로부터 보나 호랑이를 련상케 하는 이 노을옥(晚霞玉)은 하남성 남양산으로 무게는 32톤, 길이는 9.1메터, 높이는 2.6메터, 두께는 0.65메터에 달해 같은 종류의 옥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한단다.
박상활렬사기념비.
유적지 오른켠으로 발길을 옮기니 우거진 버드나무 한그루가 시야에 안겨왔으며 이 나무는 그 옆에 세워진 렬사기념비와 맥이 닿아있었다. 소개에 따르면 1931년에 도목구적위대 대장으로 파견된 박상활 렬사가 도목구로 떠나기 전에 심은 것이란다. 1904년 연길시 석국촌에서 태여나 약수동으로 이주한 그는 1930년에 일어난 ‘홍5월투쟁’에 적극 참가했으며 같은 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6년 7월에 동북항일련합군 제1군 제2사 군수부장으로 임명된 그는 1937년에 동상을 입은 발을 치료받느라 후방병원에 입원해있었다. 그해 12월 4일에 병원이 일본토벌대에 습격당하자 전우들의 철수를 위해 박상활 렬사는 혼자서 적들을 따돌렸으며 중상을 입고도 마지막 힘을 다해 싸운 뒤 벼랑 끝에서 뛰여내렸다고 한다.
박상활 렬사외 김순희, 신춘, 최상동 등 도합 28명 영웅렬사들의 사적이 소개된 약수동 주제화랑을 훑어보노라니 1930년은 중대한 의의를 갖고 있는 한해인 듯싶었다. 굵직한 사건들이 발생했을뿐더러 그해에 입당한 렬사들도 많았다. 주요사건들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1930년 2월에 설립된 중공연변특별지부위원회의 령도하에 4월 24일에 ‘5.1투쟁행동위원회’를 설립했다. 이어 ‘토지혁명을 일으키고 쏘베트정권을 수립하자’는 구호를 제기하고 전반 동북지역에 영향력을 파급한 이른바 ‘홍5월투쟁’이 전개됐다. 바로 이 투쟁과정에서 동북지역에서의 첫번째 쏘베트정권인 약수동쏘베트정부가 탄생했던 것이다.
1930년 5월 26일에 평강지역 약수동 및 장인강, 투도구, 아동촌 등 린근 마을의 1000여명에 달하는 촌민들을 동원해 약수동 상촌에서 약수동쏘베트정부 설립 대회를 가졌다. 정부가 설립된 즉시 80명의 청장년으로 구성된 약수동농민적위대를 건립했고 5월 30일 밤에 적위대를 필두로 농기구와 18자루의 소총 및 1개의 권총으로 투도구 일본령사분관을 습격하는 등 수백명의 군중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약수동주제화랑.
1930년 6월초에 일본침략자들과 지방반동군벌의 이중진압에 의해 약수동쏘베트정부는 와해됐으나 그 명맥은 이어졌다. 7월 10일에 첫회 당원대표회의가 소집됨에 따라 평강구당위가 설립됐고 8월 13일에는 동만 제1차 당원대표대회를 소집해 연화중심현위원회를 설립했다…
5월말에 설립되여 6월초에 해체된 화룡현약수동쏘베트정부, 비록 며칠 지속되진 못했지만 동북지역에서의 첫번째 인민정권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는 남다르다. 아울러 화룡 ‘혁명의 요람’으로 일컬어지는 약수동에서는 70여명의 항일렬사들이 용솟음쳐나왔다.
1985년 6월 1일에 세워진 자그마한 ‘약수동항일기념지’ 비석 앞으로 10개의 비교적 큰 비석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는 올해 5월에 세워진 것이 5개에 달했다. 화룡 항일투쟁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이곳 약수동에 대한 건설사업은 계속되고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