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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19 10:37
북만 원정대 녀투사 주신옥과 최순선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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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만 원정대 녀투사 주신옥과 최순선
           
최순선렬사의 고향 훈춘시 경신진 일각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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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5월 단오직전 300여명 대오는 로흑산으로 진군하였다. 이에 앞서 소부대가 싸움을 걸어도 정안군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여러모로 탐지해보니 정안군 놈들은 무성한 수풀 속에서 신출귀몰하는 혁명군이 두려워 여름을 꺼리고 대신 삼림대나 토비에 대해선 쌍불을 켰다. 지휘부에서는 여러 지휘관들과 토의하고 유인전술로 적들을 소굴에서 끌어내기로 하였다.

지휘부에서는 적들에게 혁명군이 대낮에 라자구로 철수하는 가상을 보인 뒤 부대를 로흑산 왕보만 근처의 산골짜기 수림 속에 은밀히 매복시켰다. 그리고는 중국어에 능한 10여명 소부대를 왕보만 마을에 파견하여 삼림대 본새로 군중의 식량을 빼앗거나 집안기물을 마구 차 굴리며 한바탕 야료를 부리게 하였다. 그래도 응하지 않으니 다음날 소부대가 또 왕보만에 나타나 로략질을 하는 척하며 삼림대가 왔다고 일러바치라고 군중들을 꼬드겼다.

드디여 100여명의 ‘정안군’ 놈들이 어슬렁어슬렁 유인조의 뒤를 따라섰다. 이자들이 바로 사도하자 참변의 살인마들이였다. 듣건대 열하에서 넘어왔다는데 ‘정안군’이라면 위만군 가운데서도 가장 악질적인 놈들로서 소대장 이상은 모두가 일본놈 지휘관들이였다. 이놈들이 팔에 붉은 완장을 끼고 다닌다 하여 군중들은 ‘훙슈톨’이라고 야유하여 불렀다.

원쑤놈들이 아군의 매복권내에 들어섰다. 일본군 지휘관 놈이 불안스레 사방을 두리번거릴 때 지휘부의 신호총성이 울리였다. 산마루에서 대기하던 아군이 일시에 불질하자 적진은 순식간에 일대 혼란을 이루었다. 이때 아군의 선동가들이 중국말로 “총부리를 일본놈들에게 돌리라!”, “총을 바치면 목숨을 살려준다!”라고 웨치며 함화를 들이대니 살아남은 놈들은 저항도 변변히 못하고 두 손을 쳐들었다. 이날 주신옥, 최순선도 전투원의 신분으로 로흑산전투에 뛰여들었다.

전투는 약 2시간 만에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이날 아군은 ‘정안군’ 100여명중 대부분을 전멸시키고 21명을 포로하였다. 요행 목숨을 부지해 달아난 놈들은 척후병 7명과 뒤에 섰던 일본놈 1명, 도합 8명 뿐이였다. 아군은 2~3명의 희생자를 냈을 뿐이다. 포로는 로비까지 줘서 보내주었는데 공산당이 포로를 죽이지 않는다는 소문이 굉장하였다. 아군은 승리의 기세 높이 박격포 1문과 중기와 경기 각기 1정, 보총 70여자루, 모젤권총 10여자루, 군마 4~5필을 비롯한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유유히 태평구로 개선하였다.

로흑산의 산골짜기ㅡ 이 골짜기는 실로 아군에게는 승리의 전적지였고 적들에게는 멸망의 골짜기였다. 로흑산전투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수차 전투 가운데서 가장 통쾌하고 가장 적을 많이 죽인 한차례 전투이고 사도하자 참변을 두고 벌어진 한차례 통쾌한 복수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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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혁명군의 부대들이 태평구에서 단오를 쇠며 북만원정 준비를 다그치고 있을 때 라자구 주둔 맹영부대가 갑자기 쳐들어왔다. 알고보니 일본놈들은 혁명군이 로흑산전투에서 박격포, 중기 등을 빼앗았지만 사용할 줄 모를 것이라 오산하고 도로 빼앗아오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1935년 6월 20일, 우리 부대는 태평구 뒤산에 올랐다. 맹영부대가 여러척의 배에 앉아 화소포강을 도하할 때 군사총지휘 김일성은 박격포를 쏘라고 명령하였다. 아군은 단지 박격포 두발을 쏘았는데 그중 한발이 배 한척을 박산냈다. 혼비백산한 맹영부대는 도하를 단념하고 황망히 도망치고 말았다.

맹대대장은 머리만 설레설레 저었다. 금방 로획한 박격포를 가지고 명중탄을 퍼부으리라곤 생각도 못한 그였다. 라자구로 돌아간 후 그는 귀신 같은 유격대와는 다신 싸우지 않겠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로서는 인민혁명군의 박격포 명사수가 위만군에서 의거한 원 대황구 주둔병사였다는 것을 알 리 만무하였다.

로흑산, 태평구 전투는 주신옥, 최순선 소속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3퇀과 4퇀이 고정된 근거지를 떠나 광활한 지대로 진출한 후 처음으로 취득한 통쾌한 전투였다.

로흑산, 태평구 전투를 치른 후 주신옥, 최순선 소속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3퇀과 4퇀은 왕청현 태평구에서 단오를 쇠며 정비를 끝낸 다음 6월 하순에 제2차 북만원정 길에 올랐다. 석두하자와 사도하자, 팔인구를 거친 원정부대는 어느덧 로야령을 톺기 시작하였다.

원정부대가 북만으로 가자면 천고의 숲을 이룬 로야령을 꼭 돌파하여야 했다. 동만과 북만의 경계를 이루는 로야령은 가파롭고 깊은 골짜기가 가로놓여있었는데 분비, 가문비, 봇나무 등이 꽉 들어차있었다. 그 속을 헤치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1934년 10월에 시작된 제1차 북만원정은 강추위가 살을 에이는 눈보라 혹한 속을 헤치였지만 제2차 원정은 키를 넘는 수풀과 뙤약볕, 모기떼의 모진 성화를 이겨내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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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것은 박격포와 중기관총을 실은 군마 때문이였다. 한편으로 새 길을 열며 전진을 가로막는 나무들을 찍어넘겨야 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앞에서 군마를 끌어당기며 뒤에선 군마를 떠밀어야 했다. 말들이 헐떡이며 가끔 걸음을 멈추다 나니 행군속도가 더디기로 말이 아니였다.

그래도 2차 북만원정은 꼭 행해야 하는 길이였다. 선차적인 것은 보다 광활한 지역에 진출하여 주보중 장군이 지도하는 북만 제5군과의 련대성이라지만 주되는 목적은 북만에서 활동하는 조선인들과의 회합이였다. 그때 북만에는 최용건, 김책, 허형식, 김정국, 리학복, 리복림, 리광림 등 조선인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3군과 4군, 5군, 6군, 7군의 시초를 열어놓은 주요 책임자들이였다.

9.18사변 후인 1931년 12월,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중공북만특위 겸 할빈시위를 취소하고 녕안, 요하, 탕원, 주하 4개 중심현위를 설립하였다. 중공만주성위의 파견으로 황포군관학교 출신 반경유(潘庆由,1891ㅡ1933)가 녕안중심현위 서기로 부임하고 녕안현위와 목릉현위, 동녕, 밀산특별지부를 직접 지도하였다. 1932년 6월에 녕안중심현위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에 따라 중공수녕중심현위로 이름을 바꾸었다. 중공수녕중심현위는 녕안, 목릉, 동녕, 밀산, 벌리 등 현위 당조직을 통일지도하는 규모가 상당히 큰 현위였다. 수녕중심현위 동지들 거의가 조선족으로 구성되였을 때 조선족동지들을 주체로 조직된 녕안, 목릉, 동녕, 밀산, 벌리 등 북만 몇개 현의 당조직을 반경유가 조직하고 이끌고 있었다. 따라서 연길현 출신인 리연록(李延禄, 1895ㅡ1985) 등을 통하여 수녕로농항일유격대대를 조직하게 되였다. 이 유격대대는 현위서기 반경유가 이끄는 수녕중심현위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며 항일구국유격총대로, 동북항일련군 제4군으로 발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녕안반일유격대로부터 항일련군 제5군의 토대를 마련한 창시자도 반경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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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견실한 조선족혁명가들이 중국인 혁명가들과 더불어 북만땅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제2차 북만원정길은 정말 꼭 행해야 하는 길이였다. 천고의 로야령도 원정대오의 앞길을 막을 수 없었다. 원정대는 드디여 로야령을 정복하고 7월에 잡아들어 녕안현 신동툰 부근에서 제5군 부대와 승리적으로 회사하였다.

왕청 3퇀과 훈춘 4퇀 주력부대로 무어진 북만원정대는 북만의 4군, 5군부대와 어울리며 녕안현에서 일련의 전투를 진행한 뒤 경박호를 건너 액목현(오늘의 돈화시 경내)으로 진출하게 되였다. 도중에 다시 산동툰에 이르렀는데 위만군 기병 수백명이 갑자기 달려들었다. 때는 1935년 7월 하순의 어느 날이였다.

산동툰은 100여세대가 모여 사는 순수 중국인 부락이다. 이 부락에서 북만원정대 김정위는 중공녕안현위 서기와 련계를 가졌고 제4군 군장 리연록도 만났다. 헌데 적들이 물밀듯이 밀려드는데 5군 주력부대는 외지에서 활동하고 5군의 일부와 4군 군부의 약간한 병력만이 남았을 뿐이였다. 적들은 동만에서 ‘고려홍군’이 왔다고 그 잡도리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원정대는 명령을 받고 신속히 마을밖에 나가 진지를 구축하고 대기하였다. 4군과 5군의 나머지 부대도 협력하여 나섰다. 위만군 기마병이 부락의 서북쪽 지대를 차지하고저 산으로 달려들 때 련합부대는 가까운 거리에서 사격을 개시하였다. 적진은 일대 혼란을 이루었다. 패주한 놈들은 남쪽 산 릉선을 타서 다시 발악적으로 기여들었으나 그곳에서도 수치스러운 참패를 면치 못하였다.

급해난 적 지휘관들은 대오정비에 서둘렀다. 그자들이 지휘소에 몰켜들 때 우리의 박격포가 포문을 열었다. 포탄은 어김없이 적진에 날아가 작렬하였다. 퇴각을 시도하던 놈들은 또 포탄의 세례를 받았다. 아비규환이 된 적들은 “‘고려홍군’이 포까지 가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아우성을 지르며 황황히 꽁무니를 뺐다.

산동툰 전투에서의 원정대의 첫 포소리는 북만땅을 발칵 뒤흔들어놓았다. 적들은 ‘고려홍군’이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떨며 감히 접어들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제2차 북만원정대는 북만땅에서 동만인민혁명군 제2군의 위력을 만방에 과시하였다.

1935년 7월 하순, 녕안현 산동툰전투를 본때스레 진행한 후 북만원정대는 5군 군장 주보중과 련계를 가지고 북만원정대와 5군과의 공동투쟁을 발기하였다.

이 발기는 주보중의 호응을 받아 인차 2군과 5군의 지도간부회의가 열리였다. 회의는 2군과 5군을 세갈래로 나누어 녕안일대와 동만의 왕청, 훈춘, 돈화, 액목일대에서 활동하기로 하였다. 회의 후 북만원정대는 액목현 흑석진과 액목소진 진공전투를 벌리며 ‘고려홍군’의 위력을 다시 떨치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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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2월에 제2군과 5군의 서로간 협상을 거쳐 2군과 5군 림시련합지휘부가 정식으로 조직되였다. 림시지휘부는 녕안에 설치되고 림시련합부대는 동서 량선과 녕안류수부대 3개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서정부대 총지휘는 주보중이 겸임하고 왕청퇀 정위가 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아군은 액목을 중심으로 남북방향으로 발전하면서 돈화, 액목일대를 정치군 사적으로 개척하여갔다. 이 시기 5군에서 녀전사들을 수요하자 2군에서는 훈춘과 왕청 출신들인 한패의 조선족녀전사들을 5군에 파견하였다. 주신옥, 최순선 등 조선족녀전사들이 5군으로 넘어감은 이런 연유였다.

이때가 1936년초로 헤아려진다. 이해 2월에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은 동북항일련군 제5군으로 개편되고 3월에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이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개편되였다. 5군은 항일련군 제5군으로 개편되면서 군부 직속부대로 부녀퇀을 두었다.

동북항일련군 여러 군들로 말하면 유일무이한 부녀퇀으로서 주신옥 등은 5군 부녀퇀의 첫 조선족녀전사로 되였다. 부녀퇀조직 관련 전해지는 자료가 보이지 않지만 이해 1936년 여름 부녀퇀이 제5군 군부를 따라 행동하면서 녕안을 떠나 목릉일대로 진출함이 알려진다. 그때 부녀퇀의 녀전사라야 10여명에 불과하였다. 책임자는 왕옥환이고 그외는 모두가 2군의 훈춘퇀과 왕청퇀에서 넘어간 조선족녀전사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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