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작성일 : 18-03-27 09:27
기계다리’로 불렸던 조선족 축구명장 허죽산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421  
기계다리’로 불렸던 조선족 축구명장 허죽산

중국조선민족 축구의 발원지인 룡정시 덕신향은 건국 전후 수많은 축구명장들을 키워냈다. 훈춘지역의 축구발원지로 각인받고 있는 대황구학교(영안진 대황구촌)의 고경 선생이 1917년 일본류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 가죽으로 만든 축구공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와 축구운동을 보급시켰다면 그보다 10여년 앞선 1905년 한국 서울의 로선생이라는 분이 축구공을 덕신향에 갖고와 장골학교(지금의 덕신향 창동촌)에서부터 축구를 보급시켰다. 그리고 1910년 단오절을 맞으면서 창동소학교와 명동소학교간에 첫 경기가 펼쳐졌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연변축구력사의 시작으로 여기고 있다.

그럼 광복(1945년 8월 15일) 전후 조선족 축구의 발원지인 덕신향에는 어떤 축구명장들이 나왔던가? 1945년 항일전쟁승리 전에는 간도성팀과 괴뢰만주국팀에서 축구를 차며 일본과 조선 지역까지 이름 날린 박익환(24세에 별세) 선수가 있는가 하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 국가급 축구팀과 중화축구팀에 발탁됐던 꼴키퍼 리혜봉, 수비수 정룡수 등 많은 명장들이 덕신향에서 나타났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립된 이후 처음으로 소집한 국가팀에 공격수로 최증석, 최호균(이 두 선수는 중국축구선수 처음으로 웽그리아 축구류학을 했음), 길림성팀과 국가팀에서 꼴을 가장 많이 넣는 ‘분사식 폭격기’로 불렸던 손중천, 수비수 최태환(최증석의 친형), 정종섭, 꼴키퍼 박장수 등 6명의 축구건아들이 덕신향에서 속출했다.

작은 시골향에서 건국 후 6명의 국가팀 선수가 속출된 것은 기적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래에 소개하자고 하는 ‘기계다리’허죽산(许竹山)도 덕신향에서 속출된 전설적인 축구명장이다. 필자는 허죽산에 대한 이야기로 《룡정체육사》, 《중국민족체육사》 등 문헌들을 참조했다.

1924년 8월 25일, 영동 100호동네(지금의 덕신향 영동촌)에서 출생한 허죽산은 두살이 되던해 어머니의 등에 업혀 대립자 수남마을로 이사하였다. 삼형제중 막내로 태여난 허죽산은 1932년에 대립자소학교에 입학했고 일본 아이들이 간편한 운동화에 고무뽈을 차는 것을 매우 신비스럽게 보고 부러워하면서부터 축구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어린 허죽산은 고무뽈을 몹시 부러워 했지만 입에 풀칠조차 겨우하는 어려운 생활에 고무뽈을 소유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였다. 그는 헝겊으로 만든 공을 매일 극성스럽게 차며 축구에 재미를 키웠다.

소학교를 졸업한 허죽산은 형과 함께 룡정으로 가 한 점방에서 잔신부름으로 호구했고 소학시절 동창의 소개로 동흥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였고 학교에서 정식으로 축구를 차게 됐다. 허죽산은 학교에서 축구훈련을 한시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달밤에도 공을 나무에 달아매 놓고 하루에 만번씩 공을 차는 훈련을 했다. 중학시절에 그의 축구기교는 이미 당시 간도성(연변)의 많은 축구 애호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42년초, 18살인 허죽산은 서울배제중학교의 초청을 받고 조선으로 나갔다. 배제중학교를 경영하던 일본인 교감은 허죽산의 축구기교를 욕심냈고 일본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사람들에 대한 원한이 깊었던 허죽산은 그의 제안을 단연 거절했고 다시 고향인 룡정으로 돌아왔다.

그 후 룡정에 돌아와 룡정축구팀에 가입한 허죽산은 룡정축구팀을 당시 간도성의 일류팀으로 이끄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또 허죽산은 간도성팀의 선수로서 여러번 전 만주국체육대회에서 1등하는 데 마멸할 수 없는 공헌을 했다.

하지만 허죽산의 축구기량이 한창 전 만주국은 물론 전 조선반도에까지 소문놓으려고 할 때 그에게 일제로부터 징용령장이 내려졌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들은 병력이 부족하자 강제징병령을 발표하며 간도성의 청년들을 전쟁판으로 내몰았다. 허죽산은 ‘너희들을 위해 축구도 하지 않은 내가 너희들의 총받이로 되라고? 어림도 없는 생각을 하지도 말라. 죽으면 죽었지 절대 참군하지 않는다.’라고 결심하며 그날 밤중으로 룡정을 떠나 길림지구의 깊은 산골에 들어가 피신을 시작했다.

1945년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전쟁에서 패하고 연변인민도 광복을 맞았다. 그제서야 자유로운 몸이 된 허죽산은 피신을 끝마치고 부모가 있는 수남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1946년 2월, 허죽산은 동료들과 함께 초청을 받고 조선 함경북도 청진으로 갔다. 료해에 의하면 당시 연변의 알쭌한 축구선수가 조선에 간 인수는 아마도 30여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에 있을 때 허죽산은 연변의 프로선수였지만 조선 청진에 나가서 청진방직공장의 로동자로 배치받았다. 하지만 워낙 축구와 인연이 깊은 허죽산은 계속해 훈련을 멈추지 않았고 퇴근 후 축구훈련을 견지했다. 1946년 10월, 허죽산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열린 조선체육인대회에 참가하였고 청진팀을 대표해 축구경기에 참가해 모든 관객은 물론 조선의 령도자 김일성도 그의 축구재능에 대해 료해하게 될 정도로 뛰여난 기량을 보여줬다고 한다.

1949년 2월에 허죽산은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조선축구단 일원으로 되였다. 1949년 8월, 웽그리아 수도 부다뻬슈뜨에서 열린 제2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고 대회 전 김일성은 허죽산에게 축구화와 운동복까지 보내주셨다고 전해졌다. 경기가운데서 허죽산의 ‘기계다리’는 정확하고 신묘한 기교를 뽐내며 온 경기장내를 뒤흔들었다. 당시 축구강국이였던 웽그리아 관중들마저 허죽산의 뛰여난 축구기교에 감탄했다. 외국의 한 축구감독은 “우리 3명의 훌륭한 선수와 허죽산을 바꾸지 않겠습니까?”라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1996년 2월 23일과 3월 2일 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체육위원회기관지 《체육신문》은 허죽산에 대한 장편기사가 실렸으며 2004년 조선체육출판사에서는 《조선의 어제와 오늘의 축구》란 책을 출판하였다. 2005년 우리 나라 《인민일보》에서도 이 책에 대한 관련 기사를 실었다. 신문은 “허죽산(1924년-1950년)은 중국 길림성 연길현 태생으로 ‘기계다리’라는 별호를 달고 뽈을 잘 찼다.”고 하였으며 “세계축구왕 펠레못지 않게 뽈을 잘 찼는데 마치 곡예배우처럼 공을 잘 다뤘다.”고 극찬한 기사를 실었다.

조선인민군 중대장으로서의 허죽산은 1950년 8월 11일 원산 철령고지에서 임무를 집행하던중 26세에 장렬히 희생되였다.


 
   
 

회사소개 | 서비스이용약관 | 개인정보보호정책 | 제휴문의
 
상호: 삼족오국제여행사    주소: 중국길림성 용정시 용정거리 中国吉林省龙井市龙井街  대표이름: 강정남    Tel:0433-8990531
HP:18744310800    사업자등록번호: 222405000016578    메일: szw0917@qq.com     관광사업등록번호 : L-JL00824
Copyright(c)  2014   Chinese Sanzuwu International Travel Service.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