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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6-14 09:45
발해의 강역을 최대로 넓힌 대인수 2집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1,165  

이러한 준비에 기초하여 대인수는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발해에 복종하지 않고  눈치를 보아가며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북방 여러 종족들에 대한 토벌을 단행하였다.

대인수의 지략과 담력발해군의 용맹에 기가 질린 북방의  종족들은 모두 무릎걸음으로 기여들어와 항복서를 바쳤다그리하여 흑수말갈부족들은 모두 발해에 완전귀속되게 되였다.

력사기록에는 대인수가 《해북의 제부를 토벌하고 령토를 크게 넓히는데 공이 있었다. 기록되여있다.

대인수는 참으로 광활한 령토를 개척하였다서쪽은 료하계선까지동쪽은 동해북쪽은 제야강 상류로부터 오호쯔크해를 련결한 계선까지 차지하였다.

이제 남은것은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여 조상전래의 옛땅을 전부 합쳐 하나로 하는 일뿐이다.

 문헌에는 대인수가 《남으로 신라를 공격하여 령토를 넓히고 새로 읍을 설치하였다. 기록되여있다또한 신라가 발해의 맹공격에 대처하기 위하여 826년에 한산주이북의 백성 1만명을 동원하여 패강장성 300리를 쌓았다고 전하고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발해가 조상전래의 땅을 하나로 합치기 위하여 신라에 대한 부단한 공격을 진행하여  북변의 적지 않은 지역을 차지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대인수는 발해의 령토가 넓어지고 각이한 지리대와 기후대에 속하는 지역들이 생겨남에 따라 해당 지역의 특성에 맞는 생업을 장려하게 하였다이것은 한편으로 지역간의 상업거래를 촉진시켰다.

주변의 당나라나 거란  나라와 족속들은 말할것도 없고 멀리 아라비아의 상인들까지 발해에 들어와 교역활동을 벌리였다.

대인수는 특히 발해의 상인들이 사신왕래의 명목으로 일본에 적극 진출하게 함으로써 일본의 경제발전을 자극하고 문화발전에도 영향을 주었다.

823 고정태를 사두로 하는 발해사신단일행이 일본에 갔을  우대신 후지와라노 오쯔구는 발해사람들이 손님이 아니라 상인들이라고 하면서 아우성을 쳤고 825년에 고승조일행이 일본에 갔을 때에도 그들은 발해사람들을 수도에 들어가게 하는 경우 나라재정을 고갈시킨다고 우는소리를 하였다.

발해사신단의 교역활동은  규모에 있어서 대단히 방대한것이였다그러한 속에서 미개하였던 일본의 경제는 눈을 뜨게 되였으며 문화적으로도 개명하게 되였다.

대인수가 821년에 파견한 왕문구를 사두로 하는 발해사절단은 훌륭한 시편들을 창작하여 일본문단을 놀래웠으며 특히 격구를 보급함으로써 깊은 감명을 남기였다왕문구 등이 출연한 격구를 보고 일본임금 차아는 《이른  타구(격구) 보며라는 시까지 지어가며 감탄하였다.

또한 격구동작을 하면서 4~6명으로 이루어진 무용수들이 춤을   연주하는 악곡이 《타구악으로 명명되여 궁중에서 경마말타고 활쏘기 등의 행사가 진행될 때마다 연주되였다그후에 말을 타지 않고 공을 치는 아이들의 유희로 되였는데  경우에는 구장구타(깃쬬)라고 불리우며 정월놀음으로 널리 보급되였다.

대인수는 어디까지나 통치계급의 리익의 대변자로서 그의 궁극적목적은 왕의 전제권을 더욱 강화하고 자기의 통치지반을 공고히 하며 착취계급의 권익을 옹호하자는데 있었다.

하지만 대인수는 10여년간의 통치기간에 발해의 국력을 강화함으로써 령토완정을 이룩하고 나라의 대외적권위를 높이는데 이바지한 재능있는 정치가군사통수이며 민족사에 자기의 자취를 뚜렷이 남긴 단군의 자랑스러운 후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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