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지대에 사는 사람들의 둔감함때문일가, 아니면 평화가 가져다준 안일함때문일가? 익히 들어왔지만 수도 없이 도문 량수를 지나치면서도 전쟁의 상처로 남겨진 량수 단교를 찾은 적이 없었다. 한번쯤은 꼭 가보리라 마음먹었던 그곳을 지난 12일에야 다녀왔다. 평화에 대한 고마움을 안고서 말이다.
요즘에 갑자기 낮기온이 섭씨 30도까지 치솟고 있지만 량수 단교를 찾은 날은 서늘바람에 몸이 으스스해나는 찬 기운이 도는 천기였다. 그나마 밤새 내린 비에 씻겨 짙어진 하늘빛과 산빛, 반쯤 내린 차창으로 솔솔 풍겨오는 비내린 뒤의 특유의 흙냄새에 차를 달리는 내내 기분좋았고 노래가사로만 접했던 두만강의 푸른 물결을 만날수 있는 행운까지 누렸다.
고스란히 남겨진 전쟁의 “흉터”
멀리 조망정자가 보이지 않았더라면 지나쳤을 법한 논밭 한가운데 뚫린 길을 따라 “두만강 단교” 철제구조물에 닿았다. 그리고 인적없이 썰렁한 유원지를 가로질러 량수 단교와 만났다. 조선의 함경북도 온성군 구청리와 도문시 량수진을 련결하는 중요 교량(길이 525메터, 폭 6메터, 교각 21개, 1936년에 착공돼 1937년 5월에 완공)인 량수단교(온성대교)는 1945년 8월 13일, 동북해방전야에 패전하여 퇴각하던 일본이 쏘련의 진격을 막기 위해 특무를 파견해 폭파했다. 다리가 건설된지 8년만인 셈이다. 그렇게 80년이 흘렀지만 다리목에 새겨진 “온성대교”, “쇼와 12년 5월(1937년) 완공” 글귀는 여전히 또렷했다. 녹쓴 다리 란간과 교각에 낀 이끼는 력사의 파란많은 이야기를 오롯이 전해주는듯 싶었다. 그리고 폭파에서 시간이 멈춘 듯 강에 그대로 꽃혀있는 철골과 몇 개의 교각만 아니였다면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든든해 보였다.
다리 우에서 멀리 동쪽을 바라보면 조선에서 유명한 왕재산혁명유적기념탑이 보인다. 서쪽 다리 밑에는 일렬로 백양나무를 심어 국경으로 정한 온성도가 보인다. 물길이 갈라진 덕인지는 몰라도 강폭이 좁은 물길은 비취색과 견줄만할 정도로 투명하고 짙푸른 물빛을 자랑하며 흐르고있었다.
교각 3분의 2에 걸쳐진 다리
량수 단교는 교각 중앙에 놓인 여느 다리와는 달리 3분의 2 즈음에 걸쳐있었다. 다리 아래를 내려보다 “이거 폭파로 다리가 밀린건 아니냐”며 아찔해지는 순간이였다. 그러나 다른 한쪽이 버젓이 교각안에 놓인것을 보고서야 안도했다.
굳이 3분의 1의 교각을 남겨둔것이 못내 궁금했다. 량수 토박이에 이 근처 력사에 빠삭한 주 작가협회 최국철 주석에게 여쭤봤다. 별도의 자료적인 근거는 없지만 추후 간이철도를 부설하기 위해서였을거라는것이 그의 주장이였다. 우리 주 삼림 깊은 곳에서 간이철도, 협궤철도가 발견됐고 량수 단교는 일본이 동북의 목재, 식량 자원을 략탈하는 중요한 교통운수로선 중 하나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의 주장에 일리가 있었다.
지난세기 10, 20년대 일본은 동북에 대규모로 철도를 부설했다. 총길이 127킬로메터에 달하는 길장철도(투도-길림), 총길이 312킬로메터에 달하는 사조철도(사평-조안), 총길이 220킬로메터에 달하는 조앙철도(조안-앙앙계), 총길이 210킬로메터에 달하는 길돈철도(길림-돈화), 총길이 101킬로메터에 달하는 천도철도(로투구-개산툰) 등이 있다. 특히 우리 주 경내에 있는 천도철도는 협궤 간이 철도이며 1933년에 철거됐지만 지금도 여전히 깊은 산속 곳곳에 남겨진 구간이 있다. 최근 몇해동안 관광부문에서 이런 협궤 철도를 리용해 관광기차 대상을 개발하고 있어 관광객들의 기대를 받고있기도 하다.
량수단교는 전쟁의 상처를 간직했지만 살같은 세월과 더불어 새삼스럽게 평화로움을 보여주는 곳이다. 보기드문 하얀 민들레꽃이 피여난 강뚝길, 사람이 두렵지 않은 듯 보란듯이 길 한복판에 버티고 선 꿩 한마리, 전쟁으로 부서져 뒹구는 것들과 이 땅에 묻힌 이야기와 더불어 처연하게 흐르는 두만강이 어우러진 이 곳 풍경은 한없이 평화롭기만 하다